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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회 전시회서문

전통 공예의 현대회화적 변용



박정기 (조선대교수·미술평론가)



노은희교수의 이번 개인전은, 그간 20년 넘게 줄곧 우리 전통 염색공예의 회화적 표현가능성을 탐구해온 이 작가의 원숙한 정신적 경지와 격조 높은 공예의 세계를 보여준다.
지난 1982년 5월 첫 개인전에서 작가는 빨강과 노랑, 초록 등 우리의 전통 원색염료와 먹을 사용하여 무명 천을 십장생 (十長生)과 귀면 (鬼面), 와당 (瓦當) 등 토착적 모티브로 장식한 염직작품들을 선보였다. 일반적으로 수성의 전통염료로 물들여진 무명 천은 빛을 반사하기보다는 대부분 흡수해들이면서 내면적인 침잠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으로, 작가는 이 점을 충분히 고려하면서도 또한 서구적이고 현대적인 조형감각과 방법을 채용하여 전체적으로 화려한 정감과 표현력 넘치는 색채장식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따라서 이 초기작품들은 이 작가가 처음부터 단순히 전통적인 염색장식의 관행에 머물지 않고 이를 하나의 풍요로운 색채회화로 확대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4년 뒤인 1986년 10월에 열린 섬유 작품전에서 우리는 이러한 작가의 의도가 거의 아무런 망설임 없이 마음껏 펼쳐진 작품들을 대하게 된다. "신선함을 내뿜는 나무. 나무들의 모임이 숲을 이루고 그 사이에서 숨쉬는 우리들. 바라보기만 하여도 가슴 뿌듯한 그 속으로 들어가 한 그루의 나무가 되고 싶은 충동이, 여기 한 올의 실과 한 조각의 천과 나무껍질 위에 물을 들이고 있습니다..." 스스로 이렇게 말하고 있듯이, 작가는 이들 작품에서 무명 천과 닥 펄프 재료에 밀가루를 이용한 호염 (糊染)과 파라핀을 사용한 방염법 (防染法)을 사용하여, 나무와 풀 숲과 나르는 새, 산과 들녁 등 자연의 형상과 풍경들을 생동하는 신선한 감각과 정열에 가득 찬 서정적 터치로 그려 보여주었다. 이들 작품들은 특히 염색작업이 갖는 특성을 살려 천과 종이 등 재료 자체가 갖는 촉각적인 질감과 이들 재료에 염료가 스며드는 침전의 효과를 십분 활용함으로써 일반 회화작품에서 보기 어려운 다양하고 다층적인 색조와 맛, 그리고 꿈꾸는 듯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그러나 지난 91년 섬유전은 이러한 작품세계의 급격한 변화를 보여준다. 이전의 작품들을 지배하던 생동감과 화려한 정감, 정열이 사라진 뒤, 빈 껍질만 남은 내면세계의 슬픔과 외로움을 토로하고 또 스스로 달래는 듯한 형태의 작품들이 주를 이루게 된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변화에 대해 다시 스스로 말한다. "아주 작은 기쁨의 조각을 어루만지며 좋아합니다. 아주 큰 슬픔의 덩어리를 바라보며 스쳐갑니다. 이 모두가 가슴속에 자신의 숲을 잃었기에... 노란 민들레가 미소짓고 매미가  노래하던 그 숲을 잃었기에... 언젠가는 남모르게 펼치려고 숨겨두었던 꿈과 함께 다시 그 숲을 만들어 봅니다." 실제로 이 때의 작품들은 대부분 여름 한철을 보내고 떠난 매미의 허물과 초록의 옷을 벗어버린 채 섬유질만 남아 가지에 매달린 나뭇잎을 연상시키는 메마르고 처연한 느낌의 형상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난 95년의 섬유전은 이와 같은 작가의 내면적 침잠의 성향이 심화되어 자연과 사물세계에 대한 침묵의 관조 (觀照) 내지 정관 (靜觀)의 태도로 발전했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 이 전시회에서 작가는, 쪽과 먹, 치자 등 색채효과가 거의 없는 염료를 최소한으로 사용하고, 재료로 사용된 닥펄프와 대, 작은 나무 조각들의 물질성과 촉각적인 재질감을 특히 강조함으로써 현대 모노크롬 회화 내지 미니멀리즘 회화를 연상시키는 작품들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때도 작가는 이러한 자신의 내면세계의 변화를 암시하는 말을 남긴 바 있다. "대숲을 스치는 바람결에, 잔잔하게 넘노는 물결에, 흔들리는 풍경의 소리결에, 늘 보아도 좋은 나무결에, 아리도록 고운 비단결에, 부드럽고 아름다운 머리결에, 어여쁜 천사의 마음결에, 섬세한 장인의 손결에, 웃으면 빠알간 손결에, 나 어느새 꿈결에 서 있더라."
이번 전시회의 출품작들은 작가가 이러한 고된 정신적 편력을 거친 뒤 우리의 전통적이고 토착적인 달관의 정신과 소박한 장식의 세계로 회귀하여 정신적 위안을 발견하였음을 알게 해준다. 전통 한지를 재료로 먹과 황토, 그리고 우리의 전통 염료를 사용한 이번 작품들은, <우리의 것>, <옛 담의 기억>, <옛 꿈> 등 제목부터 우리의 옛 것에 대한 향수를 직접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작품의 모티브들도 색동옷, 보자기, 석류, 목단, 연꽃, 학, 사슴, 거북이, 물고기 등 예외 없이 전통적이고, 토착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작가가 단순히 우리의 옛 장식의 세계를 재발견한 데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번 작품들은 옛 장식 모티브들을 이용하되 그것들을 서구적이고 현대적인 세련된 색채감각과 조형방법에 의해 새롭게 변형시킴으로써 전통장식의 아름다움과 격조를 지금까지와는 달리 새롭게 바라보게 해준다. 작가는 그간 미국과 일본 등지에서의 거듭된 해외전을 통해 현대미술의 흐름에 꾸준히 접해왔으며, 이밖에도 국내외에서의 지속적인 미술사 연구를 바탕으로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한 성찰을 심화시켜 왔다. 따라서 이번 전시작품들이 보여주는 세련된 색채감과 디자인 및 구성의 새로움은 결코 우연히 얻어진 것이 아니다.
이번 전시회에는 이러한 본격 염색공예 작품 외에도 한지를 사용한 문방용품과 생활용품, 넥타이 등 일상적인 공예작품들도 선보이고 있다. 지난 19세기 말 죤 러스킨과 윌리엄 모리스 등이 추진하였던 "공예운동 (Arts and Crafts Movement)"은 공예의 본질을 예술적인 아름다움과 실용성의 일치에서 구한 바 있다. 이번에 출품된 노은희교수의 공예품들도 이러한 관점에서 주목된다고 할 수 있다.